1장. 말하지 않아서 평온해 보일 뿐이다

싸우지 않는 관계는
대개 문제없어 보인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도 없고,
서로를 탓하는 말도 없다.
겉으로 보면 안정적인 커플이다.
하지만 그 평온함이
꼭 건강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싸움이 없다는 건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이다.
서운했지만 넘긴 말,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감정.
“이 정도는 내가 참지 뭐.”
그렇게 한 번, 두 번 삼키다 보면
말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된다.
말하지 않으면 충돌은 없다.
대신 이해도 멈춘다.
상대는 모른다.
내가 어디에서 상처받았는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모르니 바뀔 이유도 없다.
이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괜찮아.”
이 말은 갈등을 덮어두는 데는 유용하지만,
관계를 깊게 만들진 않는다.
오히려 거리만 조용히 만든다.
싸우지 않으려는 마음은
상대를 아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나를 계속 지우는 쪽이라면
관계는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다.
말하지 않으면
관계는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한쪽만 조용히 물러나고 있을 뿐이다.
싸움이 없는 관계가
항상 성숙한 관계는 아니다.
때로는
싸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어서
조용해진 것일 수 있다.
2장. 기대를 낮춘 순간부터 관계는 조용해진다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은
큰 다툼이 아니다.
오히려 기대를 말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다.
처음엔 바라는 게 있었다.
연락을 조금 더 해주길,
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주길,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주길.
하지만 그 기대는 몇 번의 실망 앞에서
천천히 낮아진다.
기대를 낮추면 편해진다.
실망할 일도 줄어들고,
괜한 감정 소모도 없다.
상대를 이해한 것처럼 보이고,
성숙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편안함에는
대가가 있다.
관계에서 열망이 빠져나간다.
바라지 않게 되면
실망도 사라지지만,
설렘도 함께 사라진다.
기대하지 않으니
기뻐할 이유도 줄어든다.
이때부터 관계는
문제없이 굴러간다.
싸울 이유도 없고,
다툴 일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지 않는다는 건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관계는 조용해진다.
연락은 이어지지만
감정의 온도는 낮아진다.
함께 있어도
각자의 생각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다.
기대를 낮춘 건
관계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관계를 정체시킨다.
싸우지 않게 된 이유는
서로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장.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를 숨기기 시작한다

관계가 멀어지는 마지막 단계는
다툼도, 실망도 아니다.
나를 숨기는 선택이다.
처음에는 솔직했다.
기분이 어떤지,
무엇이 좋고 싫은지,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반복된 오해와 어긋남 속에서
사람은 배운다.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설명할수록 더 지친다는 것을.
그래서 감정을 정리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정을 접어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예 꺼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때 관계는 안정적으로 보인다.
갈등도 없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점점 혼자가 된다.
나를 숨기면 편해진다.
기대도 줄고,
실망도 덜하다.
대신 관계 안에서
드러난 나의 면적이 줄어든다.
함께 있어도
설명할 필요가 없고,
맞춰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만큼
연결되는 깊이도 사라진다.
싸우지 않는 대신
각자의 안전한 거리만 남는다.
그 거리는 처음엔 필요하지만,
오래 유지되면
사이가 아니라 간격이 된다.
관계는 결국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나를 숨긴 채 유지되는 평온은
언젠가 무력해진다.
싸우지 않는데 멀어진 이유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처받지 않으려고 너무 조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